2013년 3월 27일 수요일

왜곡된 무아설 비판

왜곡된 무아설 비판


오늘은 한 달에 두 번 있는 정기법회가 아닙니다. 먼 데서도 이렇게 수 백 명이 오시기 때문에 우리 영산불교 신불교 사상, 진짜 부처님의 가르침을 여러분들한테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열반한 이후 2600년 동안 그 불교사상은 많이도 발전했지만 당초부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안고 있습니다. 왜곡되어 있습니다. 불교가 많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 책 처처에 왜곡되어 있다는 말을 많~이도 했습니다. 내가 법문을 할 때마다 지금의 불교는 부처님 뜻과는 거리가 멀게 많이 왜곡되어 있고, 그 위대한 불교가 너무도 왜소화 되어 있다는 말을 종종 해왔지요.

오늘 처음 오신 분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불자들이 불교 교학체계, 불교 교리를 잘 이해한다는 것은 아마 대단히 어려운 일일 겁니다. 사실 대단히 어려운 일이어요.
아마 그저 친구가 절에 가니까 따라가는, 가서 부처님한테 인사하고 소원 빌고 오는

정도라고요. 불교 교리가 어떻고 다른 종교의 교리가 어떻고 불교의 철학사상이 어떻고, 이것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대단히 적습니다. 불교대학을 나오고 승가대학(僧伽大學-막 출가한 스님들이 경전을 배울 수 있도록 사찰 내에 설치한 교육기관)을 나왔다고 하더라도 수박 겉핥기식으로 나오고, 대학원을 나오고 유학을 갔다오고 한 그런 불교학자들도 왜곡된 그 불교사상을 받아들여서 옳은 양 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큰스님이 있어서 지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아함경》의 사상 그러니까 아비달마불교, 부파불교, 소승불교 사상의 핵심은 무아(無我) ‧ 무아사상(無我思想)인데, 이 무아-제행무상 제법무아는 현상계의 진리를 말씀하신 것으로 이 무아를 본체계의 영역까지로 확장하여 이해하는 불교,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든지 제법무아(諸法無我)라든지 일체개고(一切皆苦)라든지 하는 것은 현상계의 이야기예요. 현상계 이야기예요. 반면에 열반적정은 본체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 무아를 잘못 해석 해가지고 정말 문제가 많아져버렸습니다.

잘못 해석을 해가지고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이 이야기하듯이 인도의 아쇼카왕 때에는 정말 인도에서 불교가 국교이다시피 되었었는데 반전해가지고 힌두사상에 의해서 불교가 흡수당해버렸습니다. 망해버렸어요.

무아(無我)라는 것, 그 교설을 부처님 교설로 알고 힌두사상하고 서로 논쟁을 하는데 도저히 안 되지요. 무아(無我)를 그렇게 이해하면 힌두사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길 수 없어요. 그래서 불교가 망한 거예요.

자, 무아(無我)! 없다 그거라. 나(我)도 없다 그거라.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 그거라. 그것은 현상계에서 볼 때에는 그래요. 모든 것은 인연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공(空)인 거예요. 현상계 이야기예요.

그러나 이 육신의 주인공으로서 본체(本體) ‧ 기체(基體)가 없으면 윤회 못하는 거예요. 이건 상식이어요. 그럼에도 그 불교학자들이 힌두교 학자들한테 우겼다고요. 우겼어. 영혼체라고 하는 주인공을 보지 못하고 그저 무슨 부파불교에서 많은 식(識) 이론들이

나오잖아요. ‘일미온’이라든지 ‘궁생사온’이라든지 ‘푸드갈라’라든지... 무아(無我)를 짜 맞추다가 보니까 뭐 여러 식이론(識理論)이 나오잖아요. 무아는 엄중한 교조(敎條)라고 생각했어요. 무아를 건드리면 이건 외도예요. 이 무아(無我), 없다는 것이 절체절명의 진리로 알았어요. 이 몸을 주재하는 주인공이 없다고 보는 거예요.

그렇게 해석해버린 거예요. 그렇게 잘못 되었습니다. 여러분! 나(我)가 없으면, 나(我)가 없으면 만현 스님의 법문은 누가 듣습니까? 누가 듣는 거요? 나(我)가 없으면 생각할 수도 없고 행위 

할수 없는 거예요. 나(我)가 없으면 깊은 철학적인 사유를 할 수 없는 것이고, 나(我)가 없으면 누가 극락을 가고 지옥가고 천당 갑니까? 누가? 이것은 상식이어요. 그런데 부처님 이후 지금까지 그 누구도 이것 하나 확실하게 통찰 못했다고요.

그 누구도 그랬습니다. 자, 인도불교에 양축이 있어요. 하나는 중관 다른 하나는 유식 그럽니다. 중관(中觀)-모든 것을 공(空)으로 보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주장하는 용수 청변 불호 월칭... 이런 중관학파를 형성하는 사람들, 또 유식(唯識)의 무착 세친 호법 진나... 이 두 축이

인도불교를 좌지우지 했다고요. 그러니까 힌두교에서 ‘불교가 도대체 어떤 철학사상을 가지고 있는가?’하고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당시 부파불교로서 교세가 제일 대단했던 설일체유부라고 하는 부파의 그 사상 그리고 중관사상, 유식사상 등을 딱 보니까 함정이 있어요. 함정이 있어.

나(我)가 없다는 거야. 불교가 나(我)가 없다는 거야. 나(我)가 없으면 됩니까 여러분!
여러 소승의 부파에서 주장하는 것이 한결같이 나가 없다는 거야.

나(我)가 없어? 먹고 입고하는 것의 주체, 보고 지각하고 생각하고 행위하는 주체가 없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됩니까 여러분? 어려운 말로 하니까 뭐가 뭔지, 저 말이 뭔 말인지 하고 출가자도 그렇고 재가신도도 그렇고 그냥 같이 따라다녀.

자, 이제 대승불교로 넘어 와서 밀교라든지 중국으로 넘어와서는 선사상(禪思想)이라든지 보세요. 이것을, 이 함정을 모르니까...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인연중생을 건질 수 없는 거예요. 그런 사상이 나오면 그 사상에 맞는 실천수행법이 나오는 거예요. 실천수

행법이 나오는 거예요. 자, 소승불교? 부정관(不淨觀) 하지요. 사념처(四念處) 공부하지요. 부정관, 사념처는 훌륭한 공부지요. 그러나 그것은 아라한 이상은 될 수 없습니다.
또 공(空), 공(空), 공(空), 공(空)... 하면, 이건 힌두교에서 볼 때에는 완전히 허무주의라는 거예요. 허무라는 거요.

중관학파의 공(空), 공(空). 이건 대단히 관념적이고 유식학파는 매우 철학적이라는 거요. 유식에서 오중유식관(五重唯識觀)이 있는데, 그건 해봤자... 자기들은 통달위(通達位)로 가면 보살 정도 올라간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에는

아니어. 갈 수가 없어. 아라한 이상 올라갈 수가 없어.
또 선(禪)이나 밀교(密敎)? 밀교에서는 즉신성불(卽身成佛) 한다고 하지만, 즉신성불? 불가능이어. 그것은 불능이어. 삼밀(三密)에 의해서, 신밀(身密), 의밀(意密), 어밀(語密)로 해가지고 성불한다고?

안 돼. 부처님의 가피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참선(參禪)? 깨달으면 부처인 줄 알아버려. 여러번 말했지만 깨달으면 이제 거기가 시작이어.
그래서 지금까지의 이 모든 불교 사상들이 문제가 많~아요. 이것을 신불교에서 지금

하나씩 하나씩 잡아낸 거예요. 그 많은 사상, 불교의 여러 사상을 ‘이건 아니다’ 하고 지적하려면 그위내가 항상 이야기 하지만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전혀 몰라요. 소승이든지 대승이든지 밀교든지 선불교든지 전혀 몰라요.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몰라요. 심지어 선불교에서는 ‘마음이 부처’라고 하지요. 이거 이거... 이건 아닌 거요. 이것은 큰일 날 이야기인 거예요. 지금까지 부처님 부분에 대해서 전혀 몰랐어. 정말로 어마어마한 분인데, 그 지존을 몰랐어요. 어디에 계시고 어떤 능력을 지니시고, 이것을 전혀

몰랐어요. 얼마만한 능력을 지니신 줄 아십니까? 우리 석가모니부처님은 물론이고, 여기 약사성전의 약사여래부처님, 엄청난 분이어요. 이런 존재를 부인해 왔어. 전혀 몰랐어. 모르면 가만히 있어야 되는데 부인(否認)한단 말이어. 중생을 오도(誤導)해버린단 말이어.

세계의 인류문화사가 시작되면서 종교가 하나씩 하나씩 생겨납니다. 그 종교의 교주들 대단하지요. 예수라든지 마호메트라든지 공자라든지 노자라든지 대단한 분들이지요. 그러나에 올라서야 되는 거예요. 산의 정상에 올라가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아! 유식사상, 전번에 이야기했지만 아뢰야식, 업력의 종자를 저장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되는데 아뢰야식은 그 장소가 못돼. 그런 저장소를 상정해서 그것을 갖다가 아뢰야식으로 본 거예요.

아뢰야식은 찰나생 찰나멸이어요. 그런데 어떻게 식이 모든 태산만한 업장을-우리의 업장, 그 업력이라든지 탐진치로 쌓아 온 이런 한량없는 업식(業識), 업의 종자들을 전부 저장하느냐고요. 그것도 식이 찰나생 찰나멸 하면서 그 다음 찰나의 식으로 옮겨간다는 거요. 그러면서 이 아뢰야식이 모든 우주만물을 만든

종자를 갖다가 전부 보존하고 있다는 거야. 이게 무슨 말이어? 유식에서는 아뢰야식으로부터 전부 이 우주만물이 전변(轉變) 된 것으로 봐. 이것을 잡아내려면 위에 있어야 되요. 위에 있어야 돼. 이 사상을 전부 꼬집어가지고 잡아내기가 좀 뭐해서 지금까지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한국의 1300년 된 선불교, ‘아니다’라고만 했지. 공도 있고 과도 있지만 과가 훨씬 크지. 훨씬 많지. 우리나라의 이 선불교에 대해 가만히 지켜본 거예요. 몇 번이고 간단하게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아니다!’라고만 했는데, 여러분!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신불교, 영산불교로 귀의한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여러분.
신불교에서 볼 때, 우리 부처님과 견주어 볼 때에는 하늘과 땅 차이어요. 하늘 땅이어요. 하늘 땅이라고 말한 데는 신불교뿐이어요 여러분.

그 어느 성자가, 또 그 어느 종교에서 믿는 신이 중생의 업장을 소멸해 준다고 합디까? 중생의 업장을 소멸해 줄 수 있는 분은 부처님뿐이어요. 악도(지옥 아귀 축생)에 빠진 중생을 건져줄 수 있는 힘을 지닌 분은 부처님뿐이어요. 그들은 도저히 안 됩니다. 그

그들의 능력으로서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올시다. 절대 언감생심이올시다. 그런 우리 부처님한테 우리는 귀의해야 되요. 지금까지의 불교, 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고 해요. 하지만 부처님이 없다고 하는데? 뭘 어디에다가 귀의해?

2600년 전 저기 인도 땅에 응화신으로 오신 석가모니부처님한테 귀의한다는 것이지. 그 의미가 없어요. 그 부처님이 어디로 가셨느냐 그거야. 그것을 아무리 사유해도 여태까지 답을 못 냈어요. 어디로 가셨느냐 그거야. 우리 신불교에서는 뭐라고 하지요? ‘유무를 초월한 무아 속

절대계에 여여히 계시더라’ 그거요. 이렇게 말한 건 신불교에서 한 거예요. 이것은 기가 막힌 이야기예요. 이건 핵폭탄이 문제가 아니어요. 우리 신불교가 앞으로 10년 100년... 발전해 나가면 이제 전부 세계화 안 될 수가 없는 거예요.
부처님 품안으로 들어오지 않을 수가 없어요.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주인공이 있기 때문에 행복을 구해요. 죽어서 가는 세계가 여섯 세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 신불교에서는 확실히 말합니다. 지금까지 몰라요. 경전에는

있다고도 없다고도 해놨기 때문에 학자들이나 대석학들이 왔다리 갔다리야. 우리 영산불교처럼 확실히 말한 데는 없어요. 지금까지 전혀 없어요.
오늘 시간이 많으면 좋은데 시간이... 이 소참법문이라는 것은 10분 20분 법문인 거요. 그런데 이렇게 하다가보면 이쪽으로 쭈~욱 들어가 줘야 되는데 여기서 중도에 끝나버리면 또 다음 시간에는 다른 주제로 해야 되니까 끊겨져 못해요. 끊어져가지고 이것을 이야기 못하게 되더라고. 자, 그러면 이정도로 이야기해놓습니다.  


출처/현지사 약사재일 (2012.9.23.일)자재만현 큰스님 고성 소참 법문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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