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9일 수요일

생사관의 정립-인생의 진단과 생의 목표.사후 세계의 진실-영체의여정.진리의 생사관


초파일행사 사진



생사관의 정립 - 인생의 진단과 생의 목표


지금까지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연기법과 사성제의 진리를 통해 우주의 창조에서부터 인간의 실체, 인생의 문제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우리 중생들의 실상은 어떠하며, 무엇을 대상으로 수행해야 되는지, 그리고 실제르 우리가 죽은후에 가게 되는 사후세계로서 중생들의 윤회세계의 실상을 알아보았고 성자들의 해탈세계가 있음도 보았습니다. 이제 이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올바른 생사관을 정립할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인생의 목표는 무엇이 되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불자로서 어떤 수행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정리해 드립니다.

(1) 우주의 창조와 인간의 실체

① 우주와 인간은 인연에 의해 존재의 원천인 공(空)으로 부터 창조되었다.
② 인간은 육체와 4개의 영체로 구성되어 있다.
-영체 중 질적 등위가 가장 높은 순위대로 편의상 1, 2, 3, 4번 영체로 부른다.

③4개의 영체 중 가장 고급영체인 1번 영체가 나의 실체(본체)다.


(2) 사후 세계와 실상과 영체가 가는 길

① 사람이 죽으면 영체가 빠져 나온다.

② 영체는 지은 업에 따라 중음계, 육도윤회계, 탈윤회계의 3갈래로 갈라져 간다.

③ 중음계는 4번영체로 가며, 명부에 들지 못하고 소속이 없는 무주고혼이 된다.

④ 육도윤회계는 3번 영체가 주체가 되어 가며, 전생의 지은 업에 대해 열시왕의 심판을 받고 그 결과에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천상의 다양한 경로로 윤회전생을 한다.

- 지옥은 죄업 많은 사람이 가는 곳으로서, 극무간 · 무간 · 중 · 하 · 대기지옥의 5등급으로
구분 하는데 중지옥 이상은 형언할 수 없는 형벌이 가해진다. 죽은 사람 중 97-98% 정도가
지옥으로 가고 그 대부분이 중지옥으로 간다.
- 아귀는 인색하거나 간탐이 많은 사람이 가는 곳으로서 배고픔과 기갈의 고통이 심하다.
- 축생은 은혜를 모르고 우치하거나 삿된 견해가 많은 사람이 가는 곳으로서, 사람은 업에
따라 영체가 들어가는 동물로 태어날 수 있다.

- 인간세계는 선업, 악업이 혼재한 우주 유일의 독특한 세계다.

- 아수라세계는 복은 지었으나 시기,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 간다. 1하늘 하품정도에 속하는
부유다복한 곳이나 싸움이 많다.

- 천상세계(하늘)는 욕계 6하늘과 성중하늘이 있다. 욕계 6하늘은 선업 많이 지은 사람이
가는 곳으로 용모 수려하며 의식주 걱정 없이 안락한 삶을 누린다. 6등급 54품이 있다.
성중하늘은 상당한 선정에 들어야 갈 수 있다. 금강경의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이 나는
하늘로 성인류의 반열에 들어가는 법위다. 3등급 27품이 있다.

⑤ 해탈계는 윤회를 벗어난 성자가 가는 세계로서 아라한 해탈오계, 보살정토계, 붓다의 무아 속 절대계의 3대 해탈계가 있다.

- 아라한 해탈오계는 2번 영체가 주가 되어 간다. 영체는 보름달같이 빛난다.

- 보살정토계는 1번 영체가 주가 되어 간다. 영체는 아침 햇살처럼 빛난다.

-붓다는 4개의 영체가 빛덩어리가 되어 우주 본성인 자성광의 본원광인 무량광과 하나가
되어 무아 속 절대계에 불신을 둔다.


(3) 인생의 진단과 삶의 목표

①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어 윤회하는 삶은 고통이다 (고성제-일체개고)

② 고통의 원인은 탐욕과 집착이고, 탐욕과 집착은 무명에서 비롯된다 (집성제-고통의 원인)

③ 고통의 원인을 완전히 제거하면 환희의 세계인 열반적정에 이르게 된다. (멸성제-열반적정 지향)

④ 우리 삶의 목표는 윤회생사를 영원히 벗어나 완전한 생사해탈을 이루는 것이다.

- 1차적으로는 생사 윤회를 벗어나는 아라한에 목표를 둔다.

- 2차적으로는 붓다의 지위가 보장되는 보살(8지 이상)에 둔다.

- 궁극적인 목표는 영원한 환희를 누리는 붓다가 되는 것이다.




(4) 어떻게 살아야 하나?


① 인생의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려면 열반적정에 이르는 방법을 실천해야 한다(도성제-8정도 수행)

② 이것은 결국 아라한이 되고, 보살이 되고, 궁극적으로는 붓다가 되는 수행방법을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지혜와 복덕을 완성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에 오신 목적인 일대사인연을 실현하는 길이기도 하다.

- 팔정도의 종합적 실천수행인 칭명염불이 핵심적인 수행방법이다.
- 부처님에 대한 믿음, 효행, 계행, 보살행(자비이타행), 경전공부가 핵심적인 실천과제이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요해





죽으면 어디로 가나.중음계.육도.지옥은 실제로 있다!


죽으면 어디로 가나

이제 사람이 죽으면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좀 잘 아시지요. 그러나 라디오를 시청하는 청취하는 분들은 아주 모릅니다. 정말 모릅니다. 자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이 있습니다. 가는 곳이 있는데 집착이 강한 사람은 명부를 못 들어 갑니다. 집착이 강한 사람은 명부를 못 들어 갑니다. 집착 때문에 이 세상 그리고 자기 자식 애인 손주 돈 등등 집착이 강한 사람은 명부에 못 들어 갑니다. 그 다음 자살 한 사람은 명부에 못 들어갑니다.

자기 명을 다 살아야지 살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결코 명부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명부가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확실히 저승사자가 와서 잡아간답니다. 이것은 맞는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축생이나 지옥에서 온 사람들은 이제 웃을 거에요.

이제부터 비웃습니다. 어디가 죽어버리면 끊나고 묘지를 가보면은 허망하더라. 공동묘지가 가봐라 뭐가 있더냐 그래가지고 내 법문을 비아냥 거립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지요. 이 세상 물질만 알고 저 내면세계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짖는 것이 업이지요. 그래서 다시 악도로 악도의 업을 지어서 악도로 갑니다.
20세기에 들어서 주로 일부 과학자들에 의해서 사람이 죽으면은 아주 죽는 것이 아니고 영혼은 죽는 것이 아니고 영혼. 죽는 것이 아니고 다시 전생(轉生)을 하더라. 전생. 생을 바꾼다. 전생을 하더라 하는 결론을 냈습니다. 주로 근사경험(近死經驗)이라고 해서 의료계에 종사하는 의학자들이 많이 이 사례를 수집했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의사가 진단을 해서 이건 완전히 사망입니다 하고 진단이 끊났어요. 그런데 하루 이틀 삼일 만에 살아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요런 사례를 수천 건 이 사례를 모집한 어느 미국의 의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한테 가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 온 동안에 무엇을 경험했느냐 하고 녹취해보니까 공통됩니다 거의.

그 다음. 대게 두서너 살 된 아이들에게 나타나는데요 전생 기억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다시 사람으로 오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대게 하나 천의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그 어린이는 두 세 네살 될 때 말이 이제 말을 할 수 있을 때 부모님들이 황당할 정도로 이상한 말을 합니다. 요건 우리 집이 아니라고. 내 집은 저기 부산에 있다 요런다든지.

우리 마누라는 이름이 머다 한다고 한다든지 여러분 어떻게 받아 들이겠습니까 황당하지. 그러면 메모를 해놓았어요. 이렇게 해서 수천 건을 사례를 수집해가지고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서 증명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완전히 죽는 것이 아니구나 다시 사람으로도 오구나. 저기 미국에 스티븐스라고 하는 교수가 이천 건 자료를 수집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차시환생(借屍還生) 이라는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차시환생 뭐냐. 중국에 상동성에서 일어난 일인데 죽은 지 3일만에 관속에서 소리가 납니다. 입관을 했는데 죽은 지 3일이 됐는데. 그래서 우리 아버지 살았다 해가지고 관을 열어보니까 살아나. 그래 얼마나 부인하고 자식이 반가워 합니까. 근데 말을 못해. 전혀 말을 못해. 몸뚱이는 아버지인데 말을 못해. 그래서 종이를 갖다 달라고 하니까 종이를 갖다 줬어. 펜을 갖다 달라고 하니 그야 몸짓으로 하는 거지 펜을 갖다 주니까 자기는 베트남 사람 안남인이라 그거요 이름은 유건중이라고 합니다. 유건중. 죽은 사람은 최천선이야. 여러분 아시겠지요.

그래서 이 북경대학교 조사단이 현지를 가서 확인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맞어요. 유건중의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자기 자식이 홍열 무슨 병 있잖아요. 그래서 여름인데 지금같이 삼복더위인데 두터운 두터운 이불을 얼굴까지 그냥 덮어 씌워. 어떻게 추워라고 합니다. 그래서 질식했다는. 질식사했어. 질식사해서 인제 저승 저쪽을 가가지고 오니까 자기 송장은 땅속으로 들어가버렸어. 안되죠.

그러니까 찾아 다니는 거요 막 죽은 송장을. 막 죽은 송장을. 3일된 최천선이라는 송장에 쏙 들어가버렸어. 그러니까 몸뚱이는 아버지지만 실은 유건중이라. 안남사람. 베트남하고 중국하고는 한자를 같이 씁니다. 그래서 이 사건이 대단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건입니다. 더러 더러 있습니다 그런데. 더러 더러 있습니다. 더러 더러 있는데 내가 정확한 메모를 한 것이 없네요.

그 다음에 전생회귀라는 것이 있습니다. 연령역행이라고 하지요. 최면술에 의해서. 최면도 깊은 최면 1단 2단 3단계가 있습니다. 3단계까지 깊이 넣어서 연령역행 시간역행을 하면은 전생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사건으로는 1959년에 ‘브라이드머피를 찾아서’라고 하는 책이 미국 번스타인이라고 하는 최면학자에 의해서 쓰여져 있는데 그건 대단히 참 재미있는 사건인데 이것이 미국 98개 신문 신문에 대서특필이 돼 가지고 전세계가 놀랐습니다.

요건 뭐냐 하면은 최면을 통해서 전생 전생 전생 4생까지 소급해서 봤다는 기록도 있고 칠생 전까지 소급해서 봤다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전생 그것은 대부분 상당히 맞았다 그거요. 과학적으로 검증해보니까. 현지에 파견 해보니까 학자들 조사단 그래서 여러분 사람이 죽으면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인생이란 무엇이냐 죽음이란 무엇이냐에 대해서 정말 역사가 시작한 이래로 많은 관심 있는 의식 있는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 골몰히 연구를 했습니다. 그리스 학자 중에서 플라톤이나 피타고라스 같은 사람들은 영혼은 죽지 않고 전생은 전생한다 까지 알았습니다 지금부터 그러니까 2천 몇 백년전이지요. 유명한 사람들 아닙니까.

세계적인 유명한 지식인들이 많이 전생을 믿었습니다. 우리 불교는 전생이 문제가 아니라 육도에 윤회전생 하는 것까지 알아버렸습니다. 육도 더 깊이 알았지요. 육도 죽으면 지옥 축생 아귀 인간 수라 천상 여섯 세계를 윤회하더라 하는 것까지 아는 종교가 우리 불교하고 힌두에 인도에서 발상한 힌두교하고 브라만교하고 자이나교입니다. 이 세 종교는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 현지사는 그보다 더 알고 있습니다. 무엇을 알고 있느냐. 윤회안 육도를 넘어서 윤회밖 세상을 잘 알고 있습니다. 깨달아가지고 보림을 마치면 아라한입니다. 윤회를 벗어나게 되요. 윤회를 벗어나는 세계를 성중하늘이라고 합니다 내 책에서요. 성중하늘을 더 가면 거기는 적멸의 세계요 빛의 세계요. 더 가면은 도솔정토가 있어요.

도솔천 내원궁이라는데 도솔하늘이 아니오. 도솔천 내원세계가 있어요. 거기는 불모가 가는 불부가 가는 정토입니다. 붓다를 낸 부모 붓다를 낸 공덕으로 그 하늘 갑니다. 거긴 윤회 밖입니다.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영원히 여기 안 올 라면 안 올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하늘이라고 하는 곳이니까. 그리고 거기서도 더 가면은 부처님께 시중하는 천녀의 정토가 있습니다. 거기서 더 가면 극락정토가 있습니다. 거기서 더 가면 약사정토가 있고 약사정토에서 마지막으로 사람을 몸을 받아서 붓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붓다들이 계시는 무아속 절대 세계가 있다는 것.

나쁜 사람이 죽으면은 머리에서부터 심장을 향해서 식어갑니다 여러분 몸이. 송장이요. 그리고 정말 훌륭한 세상에 환생할 정도로 착하게 산 사람들은 심장부터 식어간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심장부터. 모든 것은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서 몸을 받습니다.

모든 것은 모든 사람들은요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서 몸을 받아간다는 것. 착하게 살았으면 착한 곳으로 갑니다. 죄업을 많이 지으면은 지옥 아귀 축생으로 떨어지는데 내가 볼 때는 많은 사람들이 명부에도 못 들어가더라는 것. 명부에도 못 들어간 사람은 전생에 업이 지중합니다. 이제 천도해보면 그 사람들은 거의 중지옥을 가더라고요. 중지옥도 세 층이 있습니다.

근데 그곳으로 가더라고요. 그리고 지옥을 거쳐서 축생으로 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일이지만 특별한 예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구 죽어서 뱀이 되고 구렁이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저번에 천도재를 해보니까 자기 집이 자기 집 사정을 듣기 전에 전부 수배가 끝났지요 부처님들이. 수배가 딱 끝났는데 아드님이 어디로 가서 갔나 하고 굉장히 알고 싶어해.

그 사람이 왔으면 내가 미안한 데. 가르켜 달라고 했는데 안 가르켜 주었거든. 말 할 수가 없어. 뱀이 되었기 때문에. 20년 전에 간질을 앓다가 죽었어. 뱀이 됐더라구요. 또 조상 중에 구렁이가 된 조상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 집은 문제가 있다고 했는데 내중에 천도재를 하러 와서 물어보니까 자기 집이 집에 뱀이 구렁이가 그렇게 많이 나온다 그래. 그래서 천도한다는 거요. 그 친구들이 온 겁니다.

2006년 06월 28일 자재만현큰스님 춘천현지사 정기법회





고민 있으면 지옥? _ 지옥은 실제로 있다!

지옥은 분명히 있습니다. '고민이 있으면 마음은 무간 지옥'이라는 설법은 실제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입니다.

지옥은 우리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영체 세계의 남방 지장궁 방향에 있습니다. 차별의 현상세계에서 볼 때 지옥은 엄연히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무아 속 삼매에 들어 보니, 지장본원경에 나오는 지옥은 그일부에 불과했습니다. 여기서는 중지옥 가운데 한곳만 소개하겠습니다.

열 손가락 손톱 밑을 대꼬챙이로 찌르는 그런 지옥도 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의 영체는 고통으로 까무러쳐서 하루에도 만 번 죽고 만 번 살아날 정도록 지독한 벌을 받습니다. 그 고통은 육신이당하는 고통과 똑같이 느껴집니다.

오역죄, 사중죄를 지으면 보다 무서운 무간지옥으로 갑니다. 극무간지옥도 있습니다. 그곳의 수명은 한량없는 시간으로 정해집니다. 지옥의 벌은 자동으로 집행됩니다. 하나의 지옥은사바세계보다 넓습니다. 그것이 특징입니다.

지옥으로 들어갈 때는 크나큰 철문을 통과합니다. 지금은 이 정도만 말해 두겠습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중음계

중음계에 대한 설명이 경전에는 대단히 약합 니다. 우리 현지사만큼 중음계에 대해서 잘 아는 데가 없습니다. 사람이 비명에 죽으면 중음계에 떨어지거든 요.

명부에 못 들어갑니다. 여러분 하도 많이 법문 들 어서 여러분 잘 아실텐데. 오늘 처음 오신 분은 잘 모르실거요. 이 중음계는 춥고, 배고프고, 공포에 떱니다. 그것이 속성입니다. 지옥도 못갔다고 하지요. 그렇게 표현할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지금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도 지옥, 아귀, 축생의 고통에 비하면 천상이요, 천상락을 누리고 있어.

그러니까 지장보살은요 지옥중생 한 사람이라도 남아있는 한 나는 불과를 증하지 않으리라. 인행시에 서원을 그렇게 세웠어요. 그러나 지장보살은 그 후에 완벽한 불과를 이루셨습니다.

그걸 알아야 돼. 그래서 지옥에 떨어지면 아귀나 축생계에 반드시 오게 되거든요. 그 무서운 형벌의 세계에서 벗어나게끔 우리 자손들이, 아들,딸들이 해주어야해요. 요게 정말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역설합니다.

그 육신을 벗어나면 우리가요, 몸뚱이를 벗어나면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보다도 몇 십 배 예민해요.

그런데 모든거리와 골목과 마을과 시장과 도살장과 무덤, 심지어는 강, 산천, 나무까지도 이 중음신들이 의지하고살아요.

그래서 해가 넘어가면 음산한 이슬비가 오는 그런 날 어둑어둑할 때 죄를 짓고 밖에 나가면 안 돼요. 죄를짓지 않고 덕스럽고 착한 일을 하게 되면 그 귀신도, 하늘신이 도와줘요.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되요.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그 귀신도, 하늘신이 도와줘요.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되요.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정자와 난자가 아무리 합해져도 아뢰야식의 영혼체가 들어가지않으면 사람이 안 됩니다.

출처/2007.1.1.월(음11.13) 큰스님 부산 법회중에서



육도

육도가 있습니다. 분명히, 지옥, 아귀, 축생, 인간,수라, 천상세계가 있습니다. 육도가. 여섯 세계가. 사람이 죽으면 그걸 윤회를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윤회를하는데 이걸 강조를 해야 되요. 우리 불자들을, 영혼을 구원하려면, 지금 법문은 그런 법문을 하는 곳이 없어요. 자신이 없으니까. 모르니까 그래요. 전번에 내가 말했지요. 그래서 하늘 사람들이 복을 마음대로 쓰는 것을 보고 보살들이 보고, 저 하늘사람은 얼마 못가서 타락하겠구나. 사람으로 떨어지겠구나.

거기 가서 법문을해주는 거요. 법문을 해줘요. 보살들이요. 육도는 분명히 있고 육도윤회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육도윤회에 대한 법문, 인과에 대한 법문을 많이해 줘야 합니다. 실감 나게 해줘야 됩니다. 지옥법문 해 줘야 되고, 축생, 아수라 법문 해줘야 되고 그럽니다. 윤회법문 해줘야 돼는 거요. 그런데 지금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정신적인 고통으로 시달리면 그 자리가 지옥이다 그럽니다. 마음밖에 극락이 있는 것이 아니다. 즐겁고 행복할 때 그때야 말로 거기가 극락이다.

지금 이렇게 스님들이 법문을 하는데 이것은 하나밖에 모르는 이야기에요. 지옥이 분명히 있고, 성중하늘을 넘어서 저기 극락정토가 있어요, 부처님도 계시고, 극락세계, 지옥, 이걸 긍정해 주고 우리는 지옥 아귀 축생으로 떨어지면 안 되니까.

여러분 절대 그런 나쁜 짓 하지 마시고 착하게 사시오. 인과법문을 해 줘야되. 윤회법문을 해줘야 되는 것이요. 하늘 보살들은 그 법문을 해줘요. 욕계 하늘 천인들한테.

2007.1.1.월(음11.13) 큰스님 부산 법회중에서


윤회전생



윤회전생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수행자들과구도자들 그리고 불제자들이 숙지해야 할 사항을 요약 정리해서 간명하게 정문일침 형식으로 큰스님이 사자후하신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윤회와 전생 이야기는 한 번 더 강조해야 하고 그 중요성에 대해서 재삼 신도들과 수행자 그리고 구도자들에게 환기시켜 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누차 사자후를 설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윤회전생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며, 윤회전생의 존재는 수행자와 구도자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발심 할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그리고 윤회가 있기 대문에 수행이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가장 기초적인 진리의 가르침을 너무 무시하거나 도외시하는 우를 범하면 결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불교의 기초적 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거듭 강조하고 계심을 명료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미혹한 구도자들은 큰스님을 비방하지 말고, 불교의 기본 교리에 충실하는 지혜로운 식견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기초가 부실한 상태에서 그 위의 경지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가령 석탑의 맨 아래층을 잘못 쌓으면 위층을 쌓아올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큰스님께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의 기본 교리가 매우 중요함을 깨닫고 이를 자비로우신 마음으로 중생들과 구도자 그리고 불제자들에게 설파한 것이라는 사실을 명지하고 명각해야 할 것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큰스님은 윤회 전생의 존재가 분명히 있음을 확인해 주는 동시에 죄를 지으면 죄업을 받으며, 선한 일을 하면 선한 업을 받게 된다는 가르침을 사자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행도한 행위와 말들 그리고 생각들 하나 하나가 파장으로 이루어져 정신세계의 아카샤 레코드에 기록된다고 서양의 영성 세계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아카샤 레코드
란 무의식 세계를 기록해 두는 공간계의 업식기록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윤회 전생을 확철히 깨우쳐 알아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믿어야 합니다. 저 또한 윤회 전생을 믿지 못해서 수행 기간 동안 방황한 적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죄업이 많으면 이
러한 정신적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선근 부족으로 나쁜 인연과 자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윤회전생, 아카샤 레코드 등의 실존적 유무를 떠나서 유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 파스칼이 그의 서적에서 "신이 비록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모르지만 나는 착하게 살겠다. 그래야 죽어서도 밑져야 본전이되기 때문이다. 

즉 신이 없어도 나는 착하게 산 것으로 그만이고 신이 있다면 그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철학자의 양심을 밝힌 젓처럼 우리는 바르게 사라야 할 것입니다.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른 마음으로 부처님을 믿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 붓다의메시지는 믿음의 중요성을 큰스님의 자상하고도 엄중한 필치
로 여러 번 역설하고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윤회로 이루어진 사바세계는 부정적인 에너지와 부정적 의식, 다시 말해서 저급한 욕망과 잘못된 사유들이 존재하는 한 중생들은 사바세계를 맴돌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올바른 불제자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부정적기운을 모두 몰아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삿된 기운을 모두 몰아내도록 노력할 때 비로소 윤회의 끈을 끊고 사바세계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큰스님께서 "삿된 기운을 제거하는 것이 수행이다."라고 사자후하신 말씀에서 얻은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큰스님께서 설하신 팔정도를 통해 깨달음을 증득하게 된다는 말씀은
불제자들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해 줍니다. 

즉 팔정도가 구도자들을 미혹하는 사바세계를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로 이어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윤회 공간은 부정적 기운이 많고 큰스님 말씀대로 유혹의 늪이 많습니다. 따라서 늪에 빠지게 되면 부정적 의식에 잠식되거나 부정적 영향에 빠져 무한 반복적으로 고통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무한 반복이란'에서 나온 말로 비유하자면 '뫼비우스의 띠'처럼 띠의 양끝이 서로 반대편으로 연결되어 있어 그 위를걷는 개미는 영원히 그 띠를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윤회 세계라는 사바세계도 '뫼비우스의 띠'와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세히 목도하면 매우 무서운 사실이 아닐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윤회를 필사적인 칭명염불과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끊어버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절실히 불제자들에게 요구됩니다. 

뫼비우스의 띠를 끊어야 합니다. 그래야 윤회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자신의 모든 것을 올바른 존재자들에게 바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윤회 시스템에서는 자신이 삿된 의식으로 모은 물건이 많을수록 업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따라서 윤회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삿된 마음으로 얻은 재물과 재산을 가급적 적게 소유하
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소유를 통해서 참다운 자신의 존재성을 찾고 그 후 다시 소유의 세계로 접어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될 때 존재성을 찾은 후의 소유는 진실된 무소유, 즉 순수한 무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큰스님께서 책 전체를 통해서 윤회 전생을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윤회 전생으로부터 해탈하기 위해서는 깨달음 너머의 세계와 불보살님의 세계에 대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윤회도 사실이며 불보살님의 가피가 없으면 윤회에서 빠져나오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큰스님의 말씀도 사실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윤회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설하고 있는 가르침들을 모두 잘 소화하고 실재로 경험적으로 체득하여 수행 정진해 나가야할 것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의 에센셜 포르테(본질적 강점)는 바로 불교의 총체적 수행 체계와 심오한 세계관을 폭넓게 아우르면서 불제자가 이해하기 쉽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출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존평




중음無主孤魂의 세계



중음無主孤魂의 세계



육도의 세계, 그리고 이 삼천대천세계는 그 누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업이 만든 것입니다. 인과의 법칙과 인연의 도리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착이 많은 사람이 죽으면 그 집착 때문에 명부, 저승에 들어가지 못하고 중음이라는 윤회에 들지 못하는 세계에 머뭅니다.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상황에 해당하는 경우에 무주고혼이 됩니다.

첫 번째, 과부로 사는 여인이 어린 자식을 두고 비명으로 돌연사할 때 눈을 감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린 자식이 마음에 걸려, 집착하여 저승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또한 탐심이 많은 사람은 자기 재산 생각 때문에 이승에 남습니다.

두 번째, 암이나 중풍, 불구자 등 큰 병을 앓다가 죽어도 명부에 들지 못합니다.

세 번째, 밖에서 횡사한 분들 -. 교통사고 기타 사건사고로 갑자기 죽은 사람도 저승에 들지 못합니다.

네 번째, 자살하는 사람들 역시 명부에 들지 못합니다.
사람들 중에서 죽어 명부에 들어가는 이들은 절반도 못 될 것입니다. 명부에 들지 못한 영가귀신들은, 배고프고 춥습니다. 엄연한 하나의 생명체이기에 우리들이 먹고, 마시고……. 

성생활하고 살 듯 거기 중음세계의 영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욕구 - 먹고 사는 문제 등을 가까운 인연에 빙의해서 해결합니다.

자기 형수를 몹시 좋아하다가 죽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형수는 평소에도 신기가 있었는데 청년시동생의 고혼이 빙의되어 밤마다 통정을 했습니다. 형수는 빙의되어 그런 줄도 모르고 더 만족해했다고 합니다.

나쁜 병으로 죽은 조상의 무주고혼 영가가 빙의되면 그 자손은 조상이 앓던 병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을 비관하여 높은 낭떠러지에서 추락해서 자살한 친인척 조상 영가가 빙의되면중음계의 시간은 정지 되어 있어 죽을 당시의 생각이 어려 있다 그 자손은 기어이 그렇게 추락해서 자살합니다. 큰스님을 찾아가 조상 영가를 천도해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명부에 들어가지 못한 영가들은 몇 년, 몇 십 년, 몇 백 년…… 혹은 그 이상도 중음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승을 떠돕니다. 명부에서 정리하는 때가 있는데 그때 빠지게 되면 천 년도 넘게 중음계에서 떠돌게 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정리가 됩니다. 귀신도 기氣가 다하면 거동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때 명부에서 붙들어가게 됩니다. 중음계에서 오래 있을수록 큰 업을 짓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가능한 한 속히 명부, 윤회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당사자에게도 이익이고 자손에게도 이익입니다.

무주고혼 영가를 귀신이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종류의 귀신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동아리를 만들어 떼를 지어 다니면서 추위와 굶주림, 여타의 욕구를 해결해 가면서 삽니다. 많은 업을 짓습니다.

술을 좋아하며 중독이 되면 주정뱅이 무주고혼들이 붙습니다. 말술을 먹게 됩니다. 이때 무주고혼을 떼어놓아도 다른 동아리의 주정뱅이 고혼이 빙의되므로 떼어도 떼어도 한이 없습니다.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축생의 무주고혼도 큰 문제가 됩니다. 명命이 다해 죽지 않고 타살, 병으로 죽으면 고혼이 되는 것입니다. 

구렁이나 뱀의 고혼이 사람들에게 빙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로 인한 신통이 벌어져 뭇 여인들과 간음하는 등 크나큰 업을 짓는 사이비 도인들이 있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Ⅱ≫ 13장 사람이 죽으면 어찌되나-불교의 생사관
광명 만덕    자재 만현 저





2012년 2월 28일 화요일

영산불교는 비아非我윤회설이 부처님의 정법임을 선언한다/-2500년간 잘못해석된 '무아無我'를 비판하면서



 


영산불교는
비아非我윤회설이 부처님의 정법임을 선언한다


-2500년간 잘못해석된 '무아無我'를 비판하면서




1. 무엇이 문제인가?

부파불교시대부터 지금까지 불교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논란을 불러일으켜 오고 있는 주제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무아와 윤회주체"의 문제입니다.

학자들이 주장하는 논점의 요지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는 것은 고정불변하는 실체적인 나를 인정하는 것이 되므로 이것은 무아이론과 양립할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윤회를 하려면 항상 동일성을 유지하는 주체(실체,본체)가 있어야 하는데 불교의 무아이론은 “나라고 하는 고정불변하는 주체”가 없다고 하니 무아와 윤회주체이론은 서로 모순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라면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무아이론과 윤회는 불교의 근간이 되는 것으로서 한 가지라도 포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무아를 잘못 이해했다는데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러한 잘못된 무아론을 전제로 윤회이론을 포기해야 된다는 이론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윤회이론을 포기하면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이 문제는 더 이상 언급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불교학자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무아와 윤회주체이론을 양립시키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래서 부파불교시대에서부터 논사들은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윤회의 주체가 없으면서도 윤회가 가능하다는 여러가지 이론들을 개발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른 바 무아윤회이론입니다. 이에 비해 윤회의 주체가 있다고 주장하면 유아윤회이론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무아윤회를 주장하는 이론들은 대부분 윤회의 주체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심식류(心識類)의 어떤 존재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부파불교시대의 근본식 사상(대중부), 푸드갈라 이론(독자부), 유분식 사상(상좌부), 세의식 사상(경량부) 등이 그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후에 대승불교에 이르러 무착,세친을 중심으로 전개된 유식이론에서는 아뢰야식을 윤회의 주체로 보는 것으로 대체적인 결론이 나게 되고 이것이 지금 불교계의 대세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잘못된 이론입니다. 심식류(心識類)는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2. 무엇이 잘못 되었나?

(1) 무아에 대한 잘못된 해석-무아(無我)의 정확한 의미는 비아(非我)

무아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항상 변하기 때문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나”라는 존재도 오온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으로서, 이 몸은 결국 늙고 병들고 죽어 없어지기 때문에 나의 실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진정한 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를 현상계에는 ”나의 실체(진정한 나)가 없다” 라고 말하면 “무아(無我)”가 되고, 이를 “나의 실체(진정한 나)가 아니다”고 하면 “비아(非我)”가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아라고 하게 되면 나의 주체가 아예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지금 불교계의 무아에 대한 해석도 이런 오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비아”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인 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또 다른 나의 진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에 보다 이해하기 쉬운 용어로 생각 됩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왜 무아라고 가르쳤을까요? 

이는 부처님께서 중생들이 너무나도 “나”에 집착하여 온갖 탐욕을 일으키고 그 결과 생로병사와 윤회전생의 고통을 겪어야 하기 때문에, 무아란 가르침으로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여 고통에서 구제해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2) 현상계에 국한된 무아 개념을 본체계까지 잘못 적용- 본체계는 아(我)

무아란 개념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에 국한된 이야기입니다. 우주법계는 현상계와 본체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윤회세계는 현상계입니다. 이에 대해 완전한 해탈을 이룬 세계를 본체계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보살이나 붓다의 세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무아라는 개념은 현상계에 국한된 말입니다. 이를 본체계까지 확장해서 적용하면 안 됩니다. 지금 불교계에서 무아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는 보통 현상계에 대한 본체계의 특징을 한 마디로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표현합니다. 열반에 따르는 네 가지 덕(涅槃四德)이라고도 말합니다.


현상계 본체계

제행무상(諸行無常) ⇒ 상(常)
일체개고(一切皆苦) ⇒ 락(樂)

제법무아(諸法無我) ⇒ 아(我)

번뇌오염(煩惱汚染) ⇒ 정(淨)


이렇게 서로가 대비되는 현상계와 본체계인데 지금의 불교계는 현상계에 한해 적용되어야할 “무아”개념을 본체계까지 적용하여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엄연히 존재하는 실체인 본체계의 “아(我)” 까지 부정해 버린 크나큰 과오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는 불교의 존재이유를 부정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지금의 세계 불교계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리도 왜곡해 왔으니 크게 반성하고 참회해야할 것입니다.



3. 무아 해석의 잘못으로 어떤 문제가 발생하게 되나?

(1) 윤회의 주체가 없어도 된다는 무아윤회이론은 우주 이법인 인과법에 위배됩니다. 진리의 불교가 우주이법을 위반할 수 있습니까?

인연법(인과법)은 우주이법입니다. 그리고 중생은 육도윤회를 한다고 하는 것 또한 인생의 진리입니다. 사람은 착한 일 많이 하면 천상 등의 즐거운 세계로 가고 악한 일 많이 하면 지옥, 축생 등의 악도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행위를 한 자가 과보를 받아야 합니다. 행위를 한 자와 과보를 받는 자가 확실하게 같아야 함은 가장 기본적이고도 핵심적인 요건입니다. 이것은 우주법칙입니다.

그러므로 동일성이 항상 보장되는 윤회의 주체 또는 본체가 반드시 있어야 하며 그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윤회의 주체가 없어도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우주이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윤회의 주체 없이 연기적 흐름으로 윤회가 가능하다는 의견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론입니다. 우주이법은 칼날같이 명쾌하고 분명하게 적용되는 자연법칙입니다. 그러므로 애매모호한 윤회주체이론은 있을 수 없습니다.

(2) 식(識)은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능이 없는 식이 어떻게 윤회의 주체가 된단 말입니까?

부파불교에서나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는 식(識)은 명칭여하를 불문하고 결코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윤회의 주체가 되려면 눈·귀·코·두뇌 등을 가지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능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식(識)자체는 그러한 기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식(識)은 우리가 신체적 기관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 기관과 객관적 대상이 만나 상호 작용하여 생기는 것이지 신체기관과 독립된 식(識)이 따로 주체로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죄를 지어 감옥에 간다면 내 몸에서 식(識)을 따로 떼어 감옥에 보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유식학에서 말하는 아뢰야식도 아뢰야식을 가지고 있는 어떤 주체가 있어야지 아뢰야식 자체가 주체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식(識)을 가지고 있는 주체가 바로 영혼체입니다.

(3) 윤회주체를 부정하면 영혼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영혼체가 없다고 한다면 인간문제 해결을 본질로 하는 불교의 존립기반이 무너지지 않을까요?

식(識)을 가진 영혼체가 윤회의 주체입니다. 그런데 무아윤회는 윤회주체인 이 영혼체를 부정합니다. 영혼체는 영원히 죽지 않는 인간의 실체로서 본체계의 존재입니다.

 인간문제 해결이 불교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데 이 인간의 실체인 영혼체를 부정해 버린다면 불교의 존립기반이 완전히 무너지고 수많은 문제가 파생됩니다. 이 중차대하고 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4) 무아라고 영혼체를 부정하면 육도윤회도 해탈론도 사실상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불교의 존재이유가 있을까요?

불교 수행의 목적은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고통이 없는 해탈계로 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윤회하는 주체인 영혼체도 해탈계로 가는 주체인 영혼체도 없다면 결국 육도윤회도 부정하고 해탈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수행하고 해탈을 이루려고 합니까? 대상주체도 없는데 말입니다. 

나의 주체인 영혼체가 있어야 윤회를 하든지 해탈을 이루든지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6년 동안 그렇게도 혹독한 고행·난행을 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신 것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영혼체를 부정하면 불교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5) 영혼체를 부정하면서 천도재는 무슨 이유로 지내는지요? 천도재를 지낼 때만 영혼체가 존재하나요?

최근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고 있다고 하는 어느 종단에서 발간한 금강경 표준해설집에서도 인간의 영혼체를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습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4상(四相)인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중 수자상을 영혼으로 해석하고 이 4상을 모두 극복해야할 관념이라고 말함으로써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을 부정하면서도 대부분의 사찰에서 천도재를 지내고 있습니다.

영혼체가 없다면 지옥 가는 주체도 짐승이 되는 주체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천도재를 지냅니까? 누구를 천도시키기 위한 천도재인지요? 천도재를 지낼 때는 영혼체가 있고 그 외의 경우는 영혼체가 없는 것입니까? 

필요할 때는 있고 필요 없을 때는 없는 그런 것이 영혼체인가요? 돌아가신 분을 위해 극락왕생하라고 염불은 왜 합니까? 부처님께서 영산 당시에 목련존자 등 여러 제자의 어머니를 천도시켜 준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런 모순들에 대한 명쾌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6) 영혼체를 부정하면 불보살의 존재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왜 불교를 믿어야 하는지요?

영혼체를 부정하면 본체계에 존재하는 실체를 부정하게 되므로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계로 간 성자들의 존재마저 부정하게 됩니다. 불교 경전에 나오는 그 수많은 부처님, 보살님들을 부정하고 어떻게 불교를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법화경과 화엄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엄청난 위신력은 모두 소설이나 비유로 본다는 말입니까? 

특히 붓다가 되면 생기는 세 가지 몸 중 보신불은 네 개의 영체가 들어간 빛의 인격체로서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하는 본불입니다. 이런 부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불교는 불교가 아닙니다. 불공을 드릴 필요도 없고 예불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7) 영혼체가 없다면 제사를 지낼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상을 잘 섬기는 미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의 예가 돌아가신 조상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일입니다. 제사는 돌아가신 분의 영혼에게 음식을 공양하고 예를 올리는 의식입니다. 제사 때 오는 영혼은 불교에서 말하면 저승에 못 들어간 영혼입니다. 무주고혼(귀신)이라고 합니 다. 따라서 영혼체를 부정한다면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8) 영혼체가 없다면 부모의 수정시 무엇이 육신을 받는지요?.

영혼체는 인연에 따라 부모를 찾아 수정시 들어가게 됩니다. 이 때 식(識)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식(識)을 가진 영혼체가 들어갑니다. 영혼체가 육신을 받는 것입니다. 네 개의 영혼체 중 세 개의 영혼체가 들어가고 가장 바깥 쪽에 있는 4번 영혼체는 모태 안에서 생깁니다. 태교의 대상도 영혼체이지 식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체가 없다고 하면 안됩니다.

(9) 영혼체가 없다면 어떻게 업의 주인을 찾을 수 있나요?

영혼체는 업을 가지고 다니는 주인입니다. 영혼체가 없다면 업(業)을 가지 고 다녀야할 주인이 없어집니다. 업은 어디에 보관이 되고 그 주인은 어떻 게 찾을수 있나요? 부처님은 주인도 없는데 누구를 위해 업장소멸을 해 주시나요?

(10) 무아라 하여 열반하면“나”란 인격주체마저 완전히 없어진다면 누가 열반을 원할까요? 다음 세상에 어떻게 육신을 받나요?

열반하면 우주 본성인 공(空)에 “나의 실체”까지 완전히 녹아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무아이론이라면 과연 그런 열반을 하고 싶고 해야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데 다음 세상에 어떻게 육신을 받아올 수 있을까요? 영혼체가 없다고 하니까 이런 골치 아픈 문제가 자꾸 생기는 것이 아닐까요?

(11) 본체계의 아(我)를 부정하면 불교의 위대성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같은 차원이기를 진정 원하는 것은 아니겠죠?

무아라 해서 본체계의 아(我)까지 부정해 버리면 불교는 왜소화 되고 다른 종교보다 위대하다고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불교는 육도윤회세계 뿐만아니라 아(我)의 세계인 해탈계에 대해서도 완벽한 지식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단순히 우주본성인 공(空)을 깨친 차원인 견성의 단계는 다른 종교도 다 말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차원입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백천만리 더 들어간 정토계, 정토세계에서도 백천만리 더 들어간 절대계는 불교의 위대성을 주장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차원의 본체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는 이런 차원의 보살을 내고 붓다를 내는 종교이기에 위대한 것입니다. 공(空)과 100% 계합한 붓다의 차원에서만 창조주적 능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12) 영혼체는 해탈을 이룬 대성자가 볼 수 있습니다. 하다못해 무속인도 볼 수 있는 영혼체를 없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인간의 영혼체는 우리들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해탈을 이룬 대성자들은 영혼체를 직접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영혼체와 대화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런 성자들의 말씀을 믿고 영혼체의 존재를 믿어야 합니다.

하다못해 무속인도 볼 수 있고 빙의된 사람도 볼 수 있는 이런 영혼체를 없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4. 힌두교와 기독교의 비판에 
바르게 대응하지 못한 불교

(1) 힌두교측의 “무아” 비판에 잘못 대응한 것이 불교 쇠퇴의 한 원인

힌두교의 불교 무아이론에 대한 비판과 대응

힌두교측에서 불교를 비판할 때의 관점은 불교는 무아를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윤회의 주체나 해탈을 성취하는 주체는 무엇이냐고 질문하면서 무아사상과 윤회주체와의 모순을 지적하고 비판합니다.

이러한 힌두교의 비판에 대해 불교는 이 두 가지를 양립시키려고 온갖 이상한 논리를 동원해서 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누가 봐도 궁색하기만 합니다. 한 마디로 엉터리 논리를 개발하여 대답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한 주요한 원인의 하나로 작용합니다.

무아는 현상계에 국한된 이론이라는 것과 윤회의 주체는 본체계의 영역에 속하는 영혼체라는 사실을 명쾌하게 제시하고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었더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영원한 안락을 누리는 해탈의 세계로 갈 수 있는 “나의 주체”가 없다면 누가 불교를 믿으려 하겠습니까? 이는 오늘날 불교가 서구로 뻗어나가 활성화 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힌두교의 아트만과 불교의 영혼체

힌두교에서는 범(梵)에서 우주만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범이 다시 개별적인 주체 속으로 들어간 것을 아트만(Atman)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범과 아트만은 하나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트만이 윤회의 주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아트만은 범과 같으면서 개아(個我)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트만이 범(우주 본성)과 같다면 아트만은 행위를 할 수도 없고 업을 지을 수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트만은 개별적인 자아로서 업을 짓기도 하고 과보를 받기도 하는 윤회의 주체라고 합니다. 상당히 이중적이고 모호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주체인 영혼체는 매우 구체적이고 확실한 개념입니다. 네 개의 영혼체 중 가장 바깥 쪽에 있는 영혼체(4번)를 제외한 세 개의 영혼체(1·2·3번)는 영원히 죽지 않고 윤회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안 쪽에 있는 높은 차원의 영혼체(1번)가 인간의 본체라고 확실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영체와 우주 본성과는 다른 개념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힌두교에서는 육신에 존재하는 아뜨만을 바로 자신이라고 깨닫게 되면 이는 곧 범과 하나가 되어(梵我一如) 해탈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공을 깨친 수준으로 해탈의 수준과는 또 다른 경지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해탈의 차원도 상당히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모르고 있다는 점은 힌두교의 한계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사람을 행위(業)에 의해 판단하지 않고 출신성분에 따라 고착화 시켜버린 사성제(四姓制)는 큰 잘못이라고 보겠습니다. 아울러 동물의 피로 제사를 지내는 것도 잘못된 의식입니다.

(2)“영혼은 없다”라는 당시의 잘못된 불교교리를 가지고 논쟁을 벌인 기독교측과 영혼체 없음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잘못 대응한 불교

19세기 후반 스리랑카에서 있었던 “불교와 기독교의 역사적 대논쟁”에서 기독교측이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불교의 교리로 전제하고 공격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 당시 기독교측에서 윤회문제와 직접 관련지어 이 문제를 거론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역사적 사건에서 불교의 교리상에 영혼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세상에 알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점이 못내 아쉽습니다. 이 영혼체 논쟁에서의 우문우답(愚問愚答)에 대하여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측에서야 당시의 불교교리대로 질문한 것이니까 우문이라고까지 할 것은 없지만 정법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결과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불교의 부끄러운 한 단면입니다.


5. 무아와 윤회주체 문제에 대한 결론

(1) 무아의 바른 정의는 “현상계의 존재인‘나’는 오온의 집합체에 불과하여 실체로서의‘진정한 나’가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무아를 바르게만 이해한다면 무아이론과 윤회주체 간에 모순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비아(非我)의 개념에 보다 적합하지만 무아의 용어 속에는 현상계의‘나’에 집착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져 있습니다.

(2) 무아를 잘못 해석하여 본체계영역에 해당하는 영혼체까지 없다고 하는 것은 불교의 존립기반을 흔드는 외도의 교설(敎說)이나 마찬가지입니다.

(3) 윤회의 주체가 없어도 된다고 하는 것이 무아윤회설이라면 이는 우주이법인 인과법을 무시하는 대망언입니다. 그러므로 유아윤회설이 맞습니다.

(4) 생각과 판단을 하는 기능이 없는 심식류(心識類)는 어떠한 경우에도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식(識)의 주인인 영혼체 만이 윤회의 주체이고 동시에 해탈의 주체가 됩니다.

출처/현지궁 현지사 

불교의 목표는 무엇입니까/불가의 가르침은 본성을 철견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







불교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중생들은 각기 종자가 있다는 불가의 유식법상唯識法相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말씀이 전혀 먹혀들지 않고 귀 꽉 막

힌 지옥종자도 분명히 있습니다. 육도에 윤회할 종자가 있는 반면

윤회를 벗어날 종자, 특히 희유하지만 보살 종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옥 종자라 해서 마냥 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교화하면

됩니다. 마치 아무리 나쁜 나무라도 접接을 붙이면 좋은 나무를 얻
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착하게 살면 된다, 남 못할 일 안하면서 바르게 살면 된

다' 고 합니다. 좋습니다. 인생을 대과大過없이 살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습니다만, 그렇게 산다 해도 윤회의 생사고에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고 죽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

탈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궁극에는 붓다가 되길 원하십니다. 여기
가 완전 해탈이요, 절대 자유요, 대열반이기 때문입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펴낸곳/현지궁 현지사 




불가의 가르침은 
본성을 철견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



진여일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참됨의 본성을 뜻한다. 불

가의 가르침은 본성을 철견하는 것에 일차적 목표를 둔다.

이 본성이란 본 면목, 자성, 참 나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 이것이 바
로 우주의 체성이다.

자신의 마음이 근원 일성으로 돌아가면 본 고향에 돌아온다. 그

래서 유가에서는 이를 복명이라고 하여 명(목숨)을 태어나

기 이전의 원래 생명의 시기로 되돌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견성이다. 본성을 체화하여 증득하면 그것으로 성품과
계합하여 하나가 된다. 여기까지가 삶도 죽음도 없는 시공을 초월한

경지이다.

오온은 집착을 일으키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의미하며, 이 오온이라는 것에 의해 오감이 일어난다. 오온의 본

질이 텅 비어 있음을 관하기 위해서는 계율, 특히 음계를

철두철미하게 지켜야 한다.
사실, 불가의 가르침이 귀중한 이유는 계 정 혜 삼학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뼈를 깎는 노력과 눈물겨운 노력만

이 영혼을 환골탈테시킬 수 있다.

그리고 빛을 되돌이켜 거꾸로 내면을 비춰 보는 것을 화광반조
라고 한다. 그리고 잃어버린 고향을 찾는 것, 또는 잃어버린 마음

을 찾는 것이 바로 복본심성이다.

견성을 하게 되면 심원하고도 고차원적인 세계로 증입해 들어

간다고 큰스님께서는 전하신다. 죽 청정하고 고원하며 지고한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큰스님을 제외하고 견성 이후 아라한과

이상에 대해서는 언급한 선지식이 전무하다.

필자 수준에서도 이 논고를 작성하면서 알 수 없는 내용을 말할 수

없어 큰스님의 가르침을 열거하는 미흡한 수준을 면치 못한 점, 큰스

님께 그리고 불제자님들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
큰스님의 법 세계를 필설로 언급하는데 한계가 있으며 큰스님의 법

세계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며 부사의하며 어마어마하고 장엄하고 거룩

하다는 점을 말해둔다.
타종교 어디를 봐도 아라한, 보살, 붓다라는 체계적인 위계는 전무하
다. 그러므로 불제자들은 불가에 귀의 귀명한 것을 큰 기쁨으로 삼고

열심히 구법 정진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아라한, 보살, 붓다라는 명료한 위계는 불제자가 한 걸음 한

걸음 더 지고한 곳으로 향하고자 하는 향상심을 불러일으키는데

큰 자극제가 된다는 점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하겠다. 그리고 일체 중

생을 비롯하여 견성과 아라한과를 이룬 수행자라면 자력 수행만을 고

집하거나 고수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큰스님이 하사하신 칭명염불선

을 통해서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을 받아 타력 수행으로 아라

한과를 넘어서 보살과 그리고 불과로 증입해 나가는데 진력할 것

을 권청하는 바이다.
희유하시고 거룩하신 부처님의 법세계를 남섬부주 대한민국에 펼쳐

주신 두 분 큰스님께 오체투지하고 예배드린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펴낸곳/현지궁 현지사 


불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







불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



오늘날 수행자들이 구가(謳歌)하는 정신세계는 견성(見性), 즉 깨달음이다. 하지만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이러한 수행자의 한계, 즉 견성을 초월하여 아라한, 보살, 붓다를 거론한다. 지극히 장엄(莊嚴)한 세계가 견성의 세계를 넘어서 존재한다는 것을 극명하고도 자상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지금까지 어느 누가 아라한, 보살, 붓다라는 존재의 계층적 도식(Hierarchy Schema)과 붓다의 삼신설(三身說) 그리고 칭명염불에 의한 염불선(念佛禪)의 중요성을 이렇게 큰스님처럼 명료하게 서술하였던가?

우리 불제자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야할 것이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기존 선 불교를 건전한 시각에서 올바른 비판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불제자들은 명료하게 인식해야 한다. 

즉, 큰스님께서 선 불교가 100%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다만 선 불교의 세계를 환골탈태시켜 더욱 고원하고도 지고하게 확장시키려는 각골쇄신(刻骨碎身)과 혼연(渾然)의 노력들을 엿 볼 수 있다.

선 불교는 엄연히 한국 불교의 수행적 토양을 다지는데 좋든 나쁘든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우리 모든 불제자들은 이 점을 명각(明覺)해야 한다. 따라서 긍정적으로 볼 때 그 공로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다만 선 불교가 주장하는 견성, 깨달음(Elightenment), 확철대오(廓徹大悟)는 모두 아라한을 한계점으로 갖는다. 큰스님 말씀대로 인간으로서 견성을 하여 보림 후 아라한에 이르는 것만도 엄청난 일이며 참으로 힘든 일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선 불교의 이러한 아라한까지의 깨달음에 의해서 근본불교 당시 석가모니부처님의 삼신설 체계가 가리워지고 퇴색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점을 알리기 위해 <<21세기 붓다의 메시지>>가 출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정령 큰스님께서 단순히 선 불교의 폐단만을 비평하기 위해서 성작(聖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친술 하셨겠는가?

올바른 지견과 식견을 구비하여 큰스님의 서적과 법문을 대면한 불제자라면 큰스님의 심오한 대의(大意)를 해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선 불교의 한계를 냉정하게 지적하고 선 불교를 근본불교에 기초하여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키고자 하는 큰 스님의 염원에서 쓰여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견성(見性)이라는 것은 힌두교의 범아일여 사상과 서양의 유대신비주의 인 그노시즘(Gnosticism 靈智主義)의 최종 목표와도 맥락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카발라에서는 아인 소프(Ayin Soph 히브리어로 무한이라는 뜻)로, 타로체계에서는 우아일체(宇我一體)로, 힌두교에서는 범아일여(梵我一如)로, 그노시즘에서는 영지(靈智 Gnosis)로서 알려져 있다. 도가(道家)에서도 노자(老子)는 도가 수행 세계의 종지(宗指)를 현묘지도(玄妙之道)로 거론하고 있다. 

현묘함이란 바로 불가(佛家)의 진공묘유(眞空妙有)와 비슷한 맥락을 한다. 따라서 전 세계의 수행문화가 20세기까지 그 최종 목적을 아라한 정도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시대는 급변하고 전 세계에는 아쿼리안(Aquarius)문명을 맞이하여 뉴에이지 열풍에 명상수행에 요가, 단전호흡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하고 범람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과 세태 속에는 세계 구도자들의 보다 큰 소식에 대한 염원과 갈망이 관통하고 있다.

또한 견성의 수준으로는 생사를 완전히 초월할 수 없으며 확고한 생사관을 확립하거나 정립할 수 없다. 즉, 선 불교만이 한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영성문화와 종교 수행 체계가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는 지구상에서 아니 우주상에서 가장 심오한 수행체계이자 광대무한(廣大無限)한 철학사상을 함유하고 있다. 한편 지구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불교 박해와 탄압이 외부적이거나 묵시적으로 행해져 왔었다. 

그러한 박해와 탄압의 어려운 시절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너무 고차원적인 경지에 목표를 두는 것보다는 어쩌면 단순히 아라한 경지에 목표를 두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교 존망의 위기를 벗어나는데 나름대로 일조를 했다고 필자는 생각해 본다.

결국 선 불교는 불교의 맥(脈)을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오는 역할을 잘 이행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자각(自覺)의 눈을 크게 뜨고 오늘날의 위기에 몰린 불교를 복원시키고 중흥을 도모해야 할 때가 왔다. 

불제자들 간에 너무 음계(淫戒)가 무시되고 막행막식으로 수행을 하는 경향이 불가에 만연해 지고 있다. 이 시점에서 이를 차마 그대로 방관할 수 없는 큰스님께서 친히<<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집필하여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리라.

재차 강조하는바 선 불교는 강직한 행동과 난해한 언어구사를 통해서 어려운 시절과 고비를 잘 넘겨왔다. 어리석은 자들에게 매우 높이 보이도록 했으며 불교의 권위를 실추시키지 않도록 여러 형태로 공헌을 했다고 보아도 잘못된 것은 아니니라, 진리(Truth)는 사실은 사실이라고 말할 때 증득된다.

즉 선 불교가 전승을 통해서 이루어온 그동안의 공과는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 선 불교의 화두(話頭)와 공안(Koan)이라는 어휘는 전 지구적이고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통용어가 되기도 하였다. 다만, 큰 스님께서는 이제 21세기를 맞이하여 선 불교가 환골탈태(換骨奪胎)해야 할 시기라고 사자후하신 것임을 명각(明覺)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저 유명한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서 이런 말이 있다.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고 말이다. 이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와 시사점을 지니는 명언이라고 할 수 있다. 큰스님께서 설파하신 대로 “산 정상에 오른 사람만이 산에서 내려다본 정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리고 높은 산에 오른 사람일수록 크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수행의 경지가 높은 사람만이 정확하고 올바르게 수행세계를 통찰할 수 있는 것이다.

큰스님께서 종교명상수행세계에 있어서 가장 높고 궁극적 경지라고 하는 붓다위에 이르셨다는 사실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읽어본 이라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큰스님께서 증험한 최상승 경지에서 불교의 수행체계와 사상체계의 숭고(崇高)하고 광오(廣澳)한 면을 여실히 밝히셨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존평 
펴낸곳/현지궁 현지사 







불교의 목표는 완전한 생사해탈/ 붓다_ 성중성 聖中聖/불교 위대한 가르침이여!






불교의 목표는 완전한 생사해탈




윤회에서, 삼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른은 아라한 성자부터라고
했습니다.
아라한부터 빙의가 없습니다.
명부에도 못 들어간 영가귀신가 빙의된다면 성자가 아닙니다.
성자의 몸은 청정하며 보살은 청정하다못해 발광發光하는 것입니다.
붓다는 발광 정도가 아니라 빛덩어리 그 자체가 됩니다.
성자는 자기 나라의 말로 자기만의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는 공空을 깨쳐서, 혹은 묘유 속으로 헤엄쳐 나가며 부르게 됩니다.
따라서 그 노래는 착이 없고, 상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오도송을 읊고, 법거량하는 것은 공부의 완성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옛 스님의 것을 표절하여 흉내나 낸다면 더더욱 안될
일입니다.

먼저 불성을 보왔다면, 나의 본질도 보아야 합니다. 인간 영혼체의
비밀도 보아야한다는 말입니다. 영혼체를 영체라고도 부릅니다.
중생의 영혼체는 다층구조이며 4개의 영혼체가 겹쳐져 있습니다.
아라한 도道 이상을 이뤄야만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깊은 삼매에 자재해야 해탈이 가능합니다.

3번 영체로 몸을 빠져 나간다면, 그것은 삼매가 아니고 하늘을 여행하고
돌아온 것에 불과합니다. 스스로 장작더미를 쌓아 놓고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소신한다 해도 3번 영체로 빠져 나가는 삼매진정한 삼매가
아니라면 그를 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2번 영체로 몸을 자유로이 나고 든대도 그것 역시 진정한 삼매가 아닙니다.
1번 영제로 나갈 수만 있다면 극락정토까지 갈 수 있어서 여기부터가 진정한
삼매의 시작입니다.

삼매에 들려면 심신이 맑고 청정해야 합니다. 우주가 이 몸 안에 있고,
내가 우주 안에 있습니다. 주관과 객관이 무너진 이 경계는 아라한부터
가능합니다. 보살의 마음은 안과 밖이 수정같이 맑아 깨끗함과 더러움의
분별을 뛰어 넘습니다. 그저 깨끗하고 깨끗할 뿐입니다.

여기서부터 상대가 빙의됐는지 여부도 압니다. 그 사람이 진정한 삼메에
들었는지도 압니다. 견성하고 도통했다지만 절반 이상은 빙의된 경우이고,
공부 많이 한 수행자가 명부에 못 들어가 수행자에게 빙의된 사례도
많습니다.

그가 빙의된 데다, 그리고 선서를 많이 보아서 오도송도 나오고, 법거량도
휼륭하게(?) 하기때문에 격외를 노래한다고 해서, 아라한 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무아 속 삼매가 진정한 삼매이고, 완벽한 생사해탈, 즉 대열반은 무아 속 삼매에
자재해야 하며 무엇보다 자기의 불신을 얻는 것이 필요충분조건입니다.
불신을 얻는다는 것은 대우주와의 완전 계합입니다. 업장과 번뇌, 그 습기의
찌꺼기까지 다 녹아야 불신이 생깁니다. 이 일은 부처님 경계이기에 윤회 안
중생과는 너무 거리가 먼 법문이라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단언하건대 무아 속 절대계에 자기의 불신을 두지 못하면, 즉
청정법신과 원만보신을 구족하지 못하면 붓다가 아니라는 것만 재삼
말씀해 둡니다.

불법, 정법을 만나 삼악도에 안 떨어지는 것만도 대단하게 여기지만
가능하면 여기에서도 큰스님을 만나 수행해서 윤회를 벗어나 성자,
아라한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성중의 반열에 들면 영원히 인간세계에 안 나오려면 안 나올 수 있습니다.
어쩌다 귀한 인간의 몸을 받아서 불법을 만나고 더구나 정법의 감로
법문을 듣고서도 우리 이대로 살아야 되겠습니까?

아라한 성과를 이루면 보살행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니, 공부까지는
아니더라도 반드시 이타행만은 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그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선근공덕의 보따리가 문제입니다.
그 보따리가 커지면 우리는 영적으로 진화합니다.
아라한 되고, 보살 될 수 있는 필요한 조건을 갖추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근보따리입니다.
출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붓다_ 성중성 聖中聖


불교는 완벽한 생사해탈 곧 대열반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붓다가 나올 수 없고 불 보살이
출세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만이 붓다가 나옵니다.
'성자 중의 성자' 라 할 수 있는
붓다가 탄생하십니다.
보살이 출세합니다.
이 점이 바로 불교의 위대한 점이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불교 위대한 가르침이여!

교학하는 이들은 불교의 무진연기 무아사상 등이 불교의 위대
한 점이라고 합니다. 법계의 위대한 경전 화엄경의 일중다一中多
사상, 보살의 원행願行 사상이나 신비로운 밀교사상, 정토삼부경에
기초한 정토사상 역시 위대한 발견이라고 하여 불교가 제일이라
주장합니다. 시방삼세를 회통하는 불교의 심오한 교의와 철학 사상
은 과연 위대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한편 불교경전의 방대함도 다른 종교의 그것과 비교해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아함부만 해도 1만 8천여의 경들로 이뤄져 있
습니다. 그리고 방등, 반야, 화엄 등의 수많은 대승경전들이 있습
니다. 티베트 쪽으로 흘러 들어간 밀교의 그 수많은 분량의 경전
들까지 합한다면, 분량에서도 가히 위대한 종교라 아니 할 수 없
습니다.

또한 불교는 그 화엄사상에서 현대물리학의 상대성이론이나 양
자역학을 불 수 있어서 '과학의 과학' 이요, 선 반야 구사 유
식철학을 보면 가히 '철학의 철학' 이요, '학문의 학문'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토, 밀교 사상에서 본다면 '종교의 종교' 입니다.

과거 장엄겁 동안에 일찍이 불과를 이루셨던 삼천대천세계의 그
수많은 붓다들이 동서남북 상하에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불신佛身
은 없으나 불격을 갖춘 상수上首 보살님들도 무수히 계십니다. 그
래서 불교는 가장 힘이 있는 위대한 종교인 것입니다.

극락세계 위의 동방 약사부처님 정토정유리세계와 그 외 시방十方
에 산재한 정토세계에 있는, 무수 무량한 8지 이상 10지까지의
정토보살들과 상품등각 보살들의 수효는 더욱 많습니다.

이뿐입니까? 불 보살들을 받드는 성중들은 얼마나 되고요? 일
백사위 화엄성중의 대군단만 해도 어마어마합니다. 사람이 죽어
서 가는 명부와 지옥도 지장보살의 수중에 있습니다. 이렇듯 불교
는 위대합니다. 힘이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자랑스러운 불자라는 긍지를 갖기 바랍니다.
'붓다 중의 붓다' 요, '부처님 중의 부처님' 은 다름 아닌 석가모
니부처님이십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삼계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다음은 다보불입니다. 삼계의 지존이십니다.

붓다마다 좌우보처 보살이 배정됩니다. 그리고 붓다마다 50명
이상의 아라한급 성중이 호신합니다. 황금색 장삼과 빨강 가사 그
리고 불자佛子가 주어집니다.

불교는 위대합니다!


출처 /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2012년 2월 27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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